유트레흐트 써머스쿨

OTS 2012-2013 장학생

유럽 여행은 내게 오랜 로망이었다. 그렇기에 몇 해전, 서유럽 몇몇 나라를 여행하면서 네덜란드와 맺게 된 인연은 특별하다. 한국에 보다 잘 알려진 런던이나 베를린, 파리등과는 다르게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시야에 들어왔던 암스텔담 풍경이 너무나 인상적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수로와 마치 물밑에 잠긴 도시처럼 수면에 일렁이던 암스텔담의 독특한 풍경은 내게, 산이 전혀 없는 나라, 해수면 보다 낮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 만든 나라 라는게 어떤 모습일수 있을까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올해, Neso에서 오렌지 튤립 장학금을 받게 되어, 유트랙 여름 워크샵을 듣게 된건 정말 행운이었다. 이 글을 통해,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상 깊었던 수업 내용을 위주로 네덜란드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간략히 서술해보려고 한다.

이전에 주요도시로 로테르담과 암스텔담만 들어왔던 나로선, 작은 시골 동네를 상상하고 갔던 첫날, 유트랙 역이 생각보다 매우 커서 놀랬다. 유트랙 대학은 지금까지 12명의 노벨 수상자가 배출 되었을 정도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이다. 아직까지 한국에선 김대중 씨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래, 전문 분야에서 수상 이력이 전무한 것에 비하면 한 대학에서 12명이나 노벨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적지 않게 놀라웠다. 명성처럼 유트랙 곳곳은 커다란 대학 도시라 할 정로도 건물 여기 저기가 모두 학교이다.

네덜란드 캠퍼스를 한국 대학 캠버스랑 비교 했을 때 차이 점은 한국에선 지방 어느 대학을 가도 정문 진입부터 시작해서 아카데미의 권위를 보여주는 듯 하다면 네덜란드에선 이렇게 교회 옆 모퉁이에 사무실 공간만 달랑 있다거나, 보통 주택가에 갑자기 대학 건물이 옆에 붙어 있기도 하다.

2주간 수강한 과목은 "네덜란드 문화" 이다. 개인적으로 유럽 예술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다. 전공이 fine art 와 미디어 디자인이어서 커리큘럼을 접하고 비록 기간이 짧긴 하지만 기대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매우 의미로운 경험이었다.

첫날, 자기 소개를 하면서 언제나 그렇듯 긴장됨과 동시에 어느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과 이 시간을 함께 하게 될까 호기심이 일었다. 스무명 남짓한 클라스는 미국 친구들이 반수가 되었고, 나머지는 타이완, 중국, 한국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그 중 한국 학생들이 나를 포함해 4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똑똑하고 자기 분야에서 정말 열심인 친구들이었다. 첫 날 수업은 네덜란드의 사회 정치 일반에 걸친 내용으로, 평소 네덜란드의 개방성과 관용정책, 자유로운 사고방식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기에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특히 그들의 정치 문제, 가령 이민자들, 특히 이슬람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수년간 네덜란드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이다.

최근 10년 동안 이 문제를 슬로건으로 내 걸었던 한 정치인이 살해되고, 이어 이슬람 종교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 대낮에 칼에 맞아 살해 되는 등, 겉으로 보였던 네덜란드의 관용 사회에 대한 충격적인 어두운 이면이었다. 사실 수업을 들으며 교실에 이슬람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상당히 인종주의적이었다는 인상이다. 한편으론 한국에서도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다문화 가정 얘기를 많이 하는데 네덜란드와 비교하여 사회적 편견도 심하고, 이민자들에 대한 정책 자체가 빈약한지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만은 않았다.

대체로 수업 전반은 학사 수준의 교양과목 성격인데, 교재로 책정한 Disocovering the dutch / Emmeline besamusca & Jaap verheul 가 상당히 심도가 있으면서 다양한 분야를 어렵지 않게 서술하여 한국에도 이런 수준의 사회문화를 다루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의 일환으로 다양한 단체 여행이 있었다. 대개는 유명 박물관이나 기념물을 방문하는 거였는데, 아쉽게도 원래 계획에 있던 크뢸르 뮤지엄 답사는 취소되었다. 대신, 로테르담 보트 투어와, 델프트의 방문은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이다. 

로테르담은 이차 대전 당시 대부분의 건물이 파손되어, 유트랙과 다르게 현대적 건물들이 즐비하다. 대개 옛 건물이 거의 보존되지 않은 "디지털 시티" 서울에 사는 나로선 되려 로테르담이 식상할 정도였다.

내가 수년 전 처음 암스테르담에 도착 했을때 반한 이유는, 그들의 오래된 엣날 건축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점이다. 그림 공부를 할 때, 유난히 17세기 네덜란드의 일상을 묘사한 그림들을 좋아했었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에서 신화나 성서를 배경으로 그린 거창한 주제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소박한 실제 서민들의 모습을, 그들 집의 안팎을 배경으로 세세한 필치로 꼼꼼히 묘사한 일상의 모습들은 지금 봐도 생생할 정도이다. 놀랐던 건, 수세기 동안 그 그림 속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현재에도 여전히 그 집에 21세기 현대인들이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림 속으로 들어온 느낌 같달까. 간혹 건물 정면에 만들어진 연대를 새겨 놓은걸 발견하는데 1600년도에 지어진 건물을 보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를 그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는 델프트 출신이다. 평생을 지낸 델프트에서 그가 그린 델프트 풍경은 자기가 나고 자란 곳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네덜란드를 가 본 사람이라면 대기의 빛깔이 한국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것이다. 네덜란드에서 하늘은 천공에 낮게 드리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구름도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무쌍하다. 비가 내렸다가 거짓말처럼 금방 햇살이 드리워질 때 대기의 빛깔은 드라마틱한 추상화의 한 장면이다. 베르메르가 그린 델프트 풍경은 그런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몇 점 안되는 그의 그림을 보려면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실제 델프트의 베르메르 뮤지엄엔 복사본 뿐이어서 실망이었다.

네덜란드의 많은 도시처럼 델프트도 아기자기한 멋을 자랑한다. 마침, 주말 장이 있어 한가로운 델프트 시를 돌아볼수 있는 기회였다. 네덜란드는 곳곳에서 중고품 시장이 많다. 네덜란드가 그 열악한 환경에도 국력을 키울수 있었던건, 일찌기 17세기 황금기부터 꽃 피웠던 무역과 사업 마인드 였다는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찬란했던 예술문화 뿐 아니라 관용 정책의 역사에 대한 부분은 특히 흥미로웠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철학자 스피노자는 본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이다. 유럽 역사는 사실, 종교를 빼놓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종교적 탄압이 덜한 네덜란드의 관용 정책은 이처럼, 세계 유수의 철학자들, 예술가들을 유인하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관용 정책의 역사엔 두 가지 얼굴이 존재하는 것 같다. 네덜란드 황금기처럼, 무역으로 부강해진 나라에서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착취했던 과거의 모습은 식민지 나라의 한 사람으로 그들이 말하는 관용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

사실, 미국의 뉴욕의 원래 이름이 뉴 암스테르담이 었을 정도로 미국과 네덜란드가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였다는건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본토 인디안들을 쫓아내 만들어진 서양 국가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놀랄 일은 아니다. 다른 예로, 이차대전 당시, 세계 곳곳에서 유태인이 학살 되었지만 네덜란드에서 그 수는 유대인 70 프로에 육박하는 거의 종족 말살에 가까운 범죄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2차 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독일의 식민 기간을 거치는데, 그 기간 동안, 네덜란드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은 관용의 실체가 무엇인지 의문스럽게 한다. 그것은 현재, 네덜란드 사회가 처한 이민자 문제를 포함해서, 마약에 대한 관용 정책, 젠더, 안락사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 어쩌면 현재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내가 처음에 네덜란드 문화에 반했던건, 무엇보다 그들의 실용주의와 자유로운 사고방식, 관용정책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어떻게 게이 정체성을 갖은 사람이 그토록 인기 몰이를 하며 한 국가의 대표자가 되길 꿈 꿀수 있는가, 비록 살해 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대중 매체에서 보여지는 정치 풍경은 한국 국회 회의에서 문자 그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과 정말 다르다는 인상이다. 한국에선 국가의 통제가 사회 깊숙이 적용되고 영향을 미치는 것에 비해 네덜란드는 결혼 조차 사적 결정이지, 결코 법으로 통제 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끝으로, 네덜란드 건축 문화에 대한 인상으로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네덜란드가 건축으로 유명하다는건 나중에야 알았다. 디자인 또한 유명한데, 시내 곳곳에 싸인들을 보며 실감한다. 실제로, 몇년전, 뉴욕의 JFK 국제 공항이 혼잡스럽기로 악명높던 표지 체계를 해결하기 위해 더치 디자이너를 초대 해야 했던 일화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네덜란드에 도착하면 마치 거대한 레고랜드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평지의 나라에서, 제방을 만들어 범람을 막고, 그 유명한 네덜란드 풍차는 관개 사업과 간척 사업용으로 이용되어 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쩌면 그들이 건축물에 유난히 두각을 나타내는 건 이처럼 오랜 동안 낮은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일궈온 역사적 산물일 것이다.

유트랙 썸머 스쿨에서 그룹 프로젝의 일환으로 리히벨트의 슈뢰더 하우스를 리서치 하는 과제가 있었다. 학교 다닐 적에 시험답안으로 무작정 외우던 데 스틸 무브먼트 역시 리히벨트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깊다. 요새는 워낙 건축물 자체가 아이디얼한데 치중해서인지 지금 보면 되려 평범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1924년에 이런 모습의 건물은 마치 50년대 미국인들이 처음 스타워즈를 보고 충격받은 것과 비슷할 거 같다.

주지하다시피, 네덜란드 현대 예술에서 몬드리안은 상징적인 존재이다. 리히벨트의 슈뢰더 하우스는 몬드리안의 그림과 많이 닮아 있다. 면과 면을 잇고 선과 선을 잇는 듯한 박스형 집은 사진으로 봤을때와 실제 공간을 경험할 때랑은 정말 다른 느낌이었다. 원래 가구 디자이너였던 리히벨트는 자신의 전공을 공간을 통해 십분 살린 느낌이랄까. 가장 큰 특징은 보통 집에서 벽면을 이루는 요소가 모두 변형 가능한 문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을 모두 열어 젖히면 커다란 방 하나가 되고, 반대로 모두 닫으면 4개의 방으로 공간이 분할 된다. 신기한건 이 집에서 부인과 아이들 둘이 함께 거주했다는 점인데, 한편으론 문 넘어 전혀 사적 공간이 보호되지 않는 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처럼 너무나 유연한 슈뢰더 주택 공간은 집이 갖는 고정 관념을 깨는 동시에, 집이라는 것에 인간이 느끼는 본성을 상기 시킨다. 슈뢰더 하우스를 방문 하기 이전, 안나 프랑크 하우스를 다녀왔는데, 3년간 집안에만 갇혀 창문 조차 열수 없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란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았다. 집이란 결국 인간 몸체의 연장이라 할수 있다. 벽이 피부가 되고, 창문은 인간 시야가 되는 것이다.

리히벨트가 제작한 슈뢰더 하우스는 내게, 과연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해방의 출구인지 반대로 감옥인지 의문을 남긴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분명한건, 리히벨트 건축물 말고도 둘러보면 네덜란드의 많은 건축물들이 곳곳에서 몬드리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단순한 아파트 형태의 구조라도 무엇하나 똑같지 않게 어딘가 변화를 보여주며 전체적으로 다양한 리듬이 존재한다.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마치 병풍을 이룬 듯한 한국의 초고층 아파트들이었다. 몬드리안의 역사도, 리히벨트의 건축 철학도 부재한 한국의 아파트 공화국은 대체 어떤 역사를 갖고 탄생하게 된 것일까. 서울뿐 아니라 지방 어디를 가더라도 아파트 풍경은 똑같기만 하다. 문득, 한국인들의 집단적 사고 방식이 혹여 그 주택공간을 통해 형성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을 나와 전철을 타고 오면서 똑같은 검은 빛깔의 머리들이 수없이 떼지어 우르르 움직이는 모습은 생경하게 까지 느껴졌다.

어느 나라나 자기문화의 독특성을 갖고 있다. 다양성을 중시하고 집단보단 개인을 우선시 하는 네덜란드의 역사 문화는 내가 속한 한국 사회를 달리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어쩌면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사회적 환경이 다양성을 포기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반갑게도 요새는 많은 젊은 친구들이 국제 사회를 경험하는 기회가 많아진거 같다.

사실, 워크샵을 통해 만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은 기대를 넘는 성과였다. 지면을 통해 이 경험을 다 얘기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배운다는 건 결국 "사람"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나 역시 내가 갖은 정체성을 한국이라는 문화와 떨어져 결코 상상할 수 없듯이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없었던 걸 그들과 대화를 통해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다. 일정이 너무 짧았던게 아쉬울 뿐이었다.

의미로운 경험을 할수 있도록 좋은 기회를 준데 Neso에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

last modified Nov 06, 2015 07:03 AM